상하이의 브랜드는 매우 강력해서, 마치 서울처럼 늘 중국의 선두에 있었던 도시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상하이가, 제가 눈으로 보고 깜짝 놀란, 지금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한 건 불과 15년밖에 안됩니다.
상해의 역사와 연관이 있는 이야기지요.
청나라 말기,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해 탄생한 도시가 상하이입니다.
영국, 프랑스가 조계지(concession)를 설정하여 점령지로서의 국제화가 얼결에 이뤄졌습니다. 결과로, 중국이지만 영국이자 프랑스고, 영국과 프랑스지만 본국에서 너무 멀어 밀착되지 않은 권력의 공백지대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엔 공동 재판 모습도 있습니다. 판사, 검사가 중국-외인 1인씩 공평하게 들어가 있는.
그런 이유로 망명자의 천국이었습니다. 중국과 인근 나라는 물론 유대인, 러시아의 망명자, 도피자가 몰려들기도 했었다지요. 우리의 임시정부도 같은 맥락이겠지만요.
'동방의 파리'로 불릴정도의 국제성은 수많은 명사가 머물기도 했던 이력을 낳았습니다. 채플린, 아인슈타인, 월리스 심프슨 부인 등이 방문했었고, 작가 제이 지 발라드는 아예 이곳에서 산 경험을 '태양의 제국'으로 쓴 바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제가 빨리 발전하고, 빈부 격차도 극명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중국의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창설되었던게 당연한 결과고요. 긴 여정 끝에 정국 장악에 성공한 공산당은 상하이에 애증이 복합된 시선을 보냅니다.
실물 경제를 돌리기 위한 상하이의 노하우는 인정하여 상해 기업가에게 국영기업의 운영을 맡깁니다. 그 수익으로 정부를 운영했지만, 한눈을 팔기는 두려워 했습니다. 자본주의와 해외문물에 경도되어 언제나 부패할 준비가 된 반동 불순의 싹이 숨죽은 도시로 보았으니까요.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저는 문화혁명과 천안문 사태 두가지를 꼽습니다.
문화혁명은 중국이라는 영혼에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사회내 소통의 두절, 신뢰의 말살입니다. 문혁 세대들은 마오의 지침에 따라 연필을 놓고 삽을 들었습니다. 공부 못한 평생의 한이 있지만, 엘리트 혁명 전위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지요.
그러나, 최근들어 세계화와 민영화의 추세에 따라 실업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하이의 국영기업 출신 실업자만 80만명입니다. 청춘을 바친 연공도, 혁명의 공로도 온데간데 없습니다. 궁핍한 생활만 남았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생존이 절대과제가 된 상황에서, 내 집일지라도 당에서 지정해준 사람들이 건넌방에 들어와 살았습니다. 프라이버시는 생존의 하위개념일 뿐입니다. 일부는 방을 넓이 쓰려 한지붕의 옆가족을 고발하기도 합니다. 큰 집은 6가족이 살기도 했다 전해지지요. 10년전쯤, 미국 유학온 중국인들이 한 아파트에 몇십명씩 살던 전설적 재주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의 도시화가 급속화 되자, 외곽 새 아파트의 딱지 한장에 상하이 사람들은 흔쾌히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물론 이주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복잡다단한 양상도 보였지요.
보상이나 정서의 이유로 이전을 거부하기도 했고, 강제 철거도 있었고, 그에 따른 사고와 완력의 수준 감소, 약해진 정부에 대항하는 알박기까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단 5년의 세월동안 말이지요.
상하이는 1989년 천안문 사태의 반사이익을 봤습니다.
천안문 상황이 상하이로 이전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정부입니다. 덩샤오핑은 아예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는 방향이 답이라고 보아 1992년 상하이의 규제를 풀었습니다.
남부의 선전(심천)같은 시골도시의 성장을 눈물을 삼키며 수수방관하던 상하이입니다.
반세기간 응축된 에너지는 도시 전체를 갈아엎는 콘크리트 혁명을 일으킵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앞을 보고 달립니다. 뒤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도시전체가 장대한 계획하에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하이의 아이콘인 동방명주 옆에서도 태연히 공사들이 진행중입니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습니다.
당도 없고 인민도 없습니다. 자본과 욕망이 교미하고, 자부심과 야망이 잉태되는 현장이었습니다.
볼수록 살풍경인데, 상하이 시민보다 제가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다루겠습니다.
하지만 상하이가, 제가 눈으로 보고 깜짝 놀란, 지금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한 건 불과 15년밖에 안됩니다.
상해의 역사와 연관이 있는 이야기지요.
청나라 말기,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패해 탄생한 도시가 상하이입니다.
영국, 프랑스가 조계지(concession)를 설정하여 점령지로서의 국제화가 얼결에 이뤄졌습니다. 결과로, 중국이지만 영국이자 프랑스고, 영국과 프랑스지만 본국에서 너무 멀어 밀착되지 않은 권력의 공백지대이기도 했습니다. 박물관엔 공동 재판 모습도 있습니다. 판사, 검사가 중국-외인 1인씩 공평하게 들어가 있는.
그런 이유로 망명자의 천국이었습니다. 중국과 인근 나라는 물론 유대인, 러시아의 망명자, 도피자가 몰려들기도 했었다지요. 우리의 임시정부도 같은 맥락이겠지만요.
'동방의 파리'로 불릴정도의 국제성은 수많은 명사가 머물기도 했던 이력을 낳았습니다. 채플린, 아인슈타인, 월리스 심프슨 부인 등이 방문했었고, 작가 제이 지 발라드는 아예 이곳에서 산 경험을 '태양의 제국'으로 쓴 바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경제가 빨리 발전하고, 빈부 격차도 극명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중국의 공산당이 상하이에서 창설되었던게 당연한 결과고요. 긴 여정 끝에 정국 장악에 성공한 공산당은 상하이에 애증이 복합된 시선을 보냅니다.
실물 경제를 돌리기 위한 상하이의 노하우는 인정하여 상해 기업가에게 국영기업의 운영을 맡깁니다. 그 수익으로 정부를 운영했지만, 한눈을 팔기는 두려워 했습니다. 자본주의와 해외문물에 경도되어 언제나 부패할 준비가 된 반동 불순의 싹이 숨죽은 도시로 보았으니까요.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저는 문화혁명과 천안문 사태 두가지를 꼽습니다.
문화혁명은 중국이라는 영혼에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 사회내 소통의 두절, 신뢰의 말살입니다. 문혁 세대들은 마오의 지침에 따라 연필을 놓고 삽을 들었습니다. 공부 못한 평생의 한이 있지만, 엘리트 혁명 전위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지요.
그러나, 최근들어 세계화와 민영화의 추세에 따라 실업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상하이의 국영기업 출신 실업자만 80만명입니다. 청춘을 바친 연공도, 혁명의 공로도 온데간데 없습니다. 궁핍한 생활만 남았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생존이 절대과제가 된 상황에서, 내 집일지라도 당에서 지정해준 사람들이 건넌방에 들어와 살았습니다. 프라이버시는 생존의 하위개념일 뿐입니다. 일부는 방을 넓이 쓰려 한지붕의 옆가족을 고발하기도 합니다. 큰 집은 6가족이 살기도 했다 전해지지요. 10년전쯤, 미국 유학온 중국인들이 한 아파트에 몇십명씩 살던 전설적 재주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추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하이의 도시화가 급속화 되자, 외곽 새 아파트의 딱지 한장에 상하이 사람들은 흔쾌히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물론 이주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복잡다단한 양상도 보였지요.
보상이나 정서의 이유로 이전을 거부하기도 했고, 강제 철거도 있었고, 그에 따른 사고와 완력의 수준 감소, 약해진 정부에 대항하는 알박기까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재현되기도 했습니다. 단 5년의 세월동안 말이지요.
상하이는 1989년 천안문 사태의 반사이익을 봤습니다.
천안문 상황이 상하이로 이전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정부입니다. 덩샤오핑은 아예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는 방향이 답이라고 보아 1992년 상하이의 규제를 풀었습니다.
남부의 선전(심천)같은 시골도시의 성장을 눈물을 삼키며 수수방관하던 상하이입니다.
반세기간 응축된 에너지는 도시 전체를 갈아엎는 콘크리트 혁명을 일으킵니다.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앞을 보고 달립니다. 뒤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도시전체가 장대한 계획하에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하이의 아이콘인 동방명주 옆에서도 태연히 공사들이 진행중입니다.
실로 엄청난 기세였습니다.
당도 없고 인민도 없습니다. 자본과 욕망이 교미하고, 자부심과 야망이 잉태되는 현장이었습니다.
볼수록 살풍경인데, 상하이 시민보다 제가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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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중국은 최선이나 최상이 아닌 최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그랬던것처럼요. 하지만, 글을 읽는것만으로도 씁쓸한 느낌입니다.
우리의 결과로 보면 최적도 아니지 싶습니다.
보고도 따라오는걸 보면, 외길인가 싶기도 하고.
아..외길이라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후... 정말 그것뿐인건지..
그나저나 이제 mode님 슬슬 여행병이 도질 때가 되지 않았나요. ^^
잘 읽었습니다. 관광지로는 별로일거 같군요. -_-(빠른 결론)
저런 상황이 상상이 안되는군요. 저는 참 좋은 시절에 태어난거 같습니다.
그나저나, 링크만 미리 해놓으시고! 언능 올려주세욧..
음.. 링크 찍어보셨나봐요. -_-;
듣기에 상하이는 근처 여행을 위한 기착지로 의미가 더 큰가봅니다.
동방명주 바로 옆에 저런 건물이.. 이 도시의 개발속도는 우리는 저리가라할만큼 아찔하더군요. 빨래를 죄다 밖에 내건 허름한 연립주택들 사이로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서 있어서 참 기묘한 풍경이다, 생각했었습니다.
진짜 압축 성장입니다.
그 허름한 연립주택은 조만간 사라질 건물이겠죠.
최근 50년으로 잡아야할까요? 가속화되어가는 자본주의의 모든 모습들이 상하이라는 도시안에 응축되어 폭발하는 그런 모습인듯 합니다. 더불어 부작용도 그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겠지요. 이 도시의 10년후가 궁금해집니다.
상하이의 미래 부분에 대한 글이 뒤에 이어집니다.
6회 막편쯤 될겁니다.
시간 나면 읽어주세요. ^^
ddd
흑흑.. 또 스팸통에 들어가있네요.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합니다.